그 날의 해 그름이 지기 전에 집으로 향하고 해가 흩뿌려지기 전에 일터로 향하여
보통의 낮과 보통의 낮이 꺾어진 일상을 살아내는 나는, 간호사다.
간호사가 메인인지 엄마나 딸이나 며느리로서의 삶이 메인인지 사이드의 삶을 알 수 없는 혼재함 가운데 일상은 보태어간다. 구름이 가만히 건네는 소리에 그 날의 삶을 규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감사함이 자리한다면 그 삶의 가치는 기쁨인 것 같다.
아이는 평균 38도. 40도를 조금 못 미치는 고온의 열기 속에서 그 텁텁하고 끈적끈적한 공기의 흐름에 익숙해지기라도 하듯 숙연하고 건조하며 평온한 오수를 이어간다.
병원을 나서면 다른 층의 병실을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 꽤 오랜 시간동안 반복되어서 업무 중인지 업무외의 시간인지 가늠할 기준이 모호한 시간이었던 듯하다.
다섯 살 그 남자아이는 엄마의 동그랗게 봉기 된 이마를 닮아서 도드라지는 옆모습에서 느껴지는 두엄 같은 라인이 있는 아이다. 역시나 엄마의 동그랗고 선한 눈매를 닮아서 찡긋거릴 때조차 동글하다고 느껴지는 눈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이의 병명은 Glioma. 연수를 압박하는 신생물이 그 아이의 한쪽 눈을 감기고 한쪽 눈꺼풀은 테이핑 안대를 이용해야 감겨지고 비강을 통해 호흡할 수 없었던 날숨은 인공절개관을 통한 공기의 흐름을 허용해야 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끓어오르는 객담을 흡인해 주지 않으면 발작같은 경련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붉고 낮은 밤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새벽녘 병실에서 석션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종결했다. 모나지 않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고 그 날의 너를, 그날의 너의 날을 축복하노라 귓가에 읊조리며 아이의 안부를 묻는 일상을 창조했다. 꽤 오랜 시간 아이와 엄마와 퇴근하는 아빠와 조모의 간호는 변주곡 없이 어제와 그제와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달의 병간호에도 지쳐가던 나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간호란 사랑이 없이는 끊어내어질 수밖에 없음을 절감한다. 그 아이의 삶의 엄청난 일부를 병실에서 함께 한 시간은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것이었던 거였다. 그 작은 손을 잡아보고 쥐어보고 그 볼에 입 맞추고 새벽의 찬기가 스치는 뺨에 엄마의 뺨을 가져다대어 “우리 아이의 숨소리가 너무 좋다” 고 말하는 한 어머니가 존재하므로 이생의 삶이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라고 믿는다.
일상의 필요로 살아내는 간호사로서의 시간이 한 존재를 향한 보살핌과 위로가 될 때 그 영혼이 진정 위로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엄마의 사랑으로 케어하지 못한 직업인으로서의 나를 자성하며 그 시간을 회고하고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