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오늘도 출근 시간은 다가오고,
한발자욱. 두발자욱. 병원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인간 문유라는, 간호사 문유라로
한발자욱. 두발자욱. 변한다.
그리고 비로소 입은 간호사 근무복은
입고 있는 동안은 나를 잠시 내려놓고,
어떻게든 한 사람 간호사로 완성시켜 두 발로 우뚝 서 있게 만드는
기이한 힘이 있음을... 새삼 느낀다.
말기암. 속칭 터미널 환자.
어쩌면 이젠 익숙하고. 이미 떠나보낸, 환자분들도 참 많은데..
환자 J님은 아주 오랜기간 투병하셨던 분이었다.
PTBD도 3개, 아주 심한 황달도 어쩔 수 없이 지속되어,
피부도 눈 공막도, 온 전신이 녹빛이다 못해 검푸른빛 마저 함께 감돌았다.
남편은 그런 J님에게 헌신적이고 비관적인 이야기가 오갈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의지가 강하셨다. 그만큼 입원기간 내내 의사와 간호사 모두에게 사소한 것 하나하나 꼼꼼히 요구하시고, 항상 Stat, Stat, 즉각적인 처치와 설명을 요하시는 때가 빈번하여,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많은 Complaint를 경청하고 하나하나 중재해드리는 것들이, 동시다발적 중증 우선순위가 높은 업무가 가중되거나, 의사 선생님의 수술방 재중 등 상황에 따라 그런 다양한 complaint 들이 의사 간호사 모두에게 벅찬 때가 참 많았다.
때문에 J님의 남편분의 요청으로 Notify를 할 때면, 담당 의사 선생님이 아니셔도, 담당 간호사가 아니었더라도 이름만 말해도, 얼굴만 보아도, 모든 의료진들이 아는 환자와 보호자분이셨다.
의료진에겐 다소 예민하신 분으로, 그 남편분께 조심스런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실 J환자분에게는 매우 애처가 이신,
가장 든든한 지원군인 보호자셨으리라.
어쨌거나 담당간호사로써 병실을 들어가는 마음 한 켠은
항상 무거울 수 밖에 없었다.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를 들어드려야 할까.
어제와 오늘은 또 어떤 것이 불편하셨을까. 어떤 것을 원하실까.
내 업무시간에 해결해 드릴 수 있는 내용들이면 좋을텐데.
의사선생님이 Call은 받으실까. 화만 내지 마시오.
의식의 흐름대로 많은 상념을 안고, 병실로 들어간다.
오늘따라 Nursing Cart가 굉장히. 굉장히. 무겁다.
오늘따라 병마가 완연히 눈에 보이는
환자 J님의 곁을 지키는 남편 분과 J님이, 맞잡은 두 손이 눈에 밟혔다.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J님의 상태 면담을 위해
교수님 외래 진료실을 방문하고 온 남편.
인수인계 내용상,
아마 완화의료기관으로 전원 준비를 하시게끔 설명을 들으셨나보다.
"교수님이... "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남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얼굴이 상기된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남편을 지그시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녀가
마르고 갈라져 부르튼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말했다.
" 우리... 오래... 많이... 살았잖아..."
" 애들도 이미 다 키워서 다 컸고..
행복한 날도 있었고.. 슬픈 날도 있었고..
살면서 둘이서 겪어볼 수 있는 것들은..
당신이랑 나랑 같이.. 우리 둘이 함께 할 수 있는거.. 많이 다 해봤잖아. “
눈빛만 보아도 이미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다 알고,
되려 남편을 위로하는 그녀의 말들은
결국 침착하게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간호해왔던
그를 오열하게 만들었고.
녹빛에 주름진 병든 손으로
그녀는 남편을 쓰다듬고 손을 잡으며
되려 남편을 위로하며 엷게 웃는다.
천천히 이별을 준비하는 그분들을 향한 짧은 목례.
묵묵히 커튼을 쳐드리는 것 밖에 해드릴 수 없어 안타까웠다.
거동가능하신 많은 환자 보호자 분들이
커튼 밖에서 조용히 병실을 비워주셨다. 마음껏 우실 수 있게.
그 분들도 젊고 건강하게 아름답게 빛난 찬란한 날들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뜨겁게 사랑했을 것이며.
남부럽지 않게 거창한 것은 비록 아닐지라도,
같은 꿈을 함께 꾸고. 같이 웃고. 싸우기도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세월을 달려왔을진대...
남는 사람이 괴로울까. 떠나는 사람이 괴로울까.
무의미한 질문.
간호사 tea룸에서 살짝 나온 눈물을 훔치며
오늘따라 한껏 이입된 감정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 동시다발로 할 일이 진정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환자 분들의 I/O는 check하며 정작 내 몸에는 물 한 모금 화장실 한번 못 챙기며 일하는게, 새삼스럽지 않으나 굳이 상기하자면 서럽기는 한 일이었건만. 오늘만큼은 왠지 기꺼웠다.
그리고 끌고나온 Nursing Cart.
아까는 분명 오늘따라 무겁다 느껴졌던 Nursing Cart 가
갑자기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은 내 착각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