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깊이를 잴 수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그 크기를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그 마음을 측정할 수 있다면, 환자와 보호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 나는 환자가 늘 최우선이었다. 환자 중심의 간호를 신념처럼 여겼고,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믿어왔다. 그래서 임종이나 임종을 앞둔 상황에서도 보호자를 다독이기보다는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치료 방향을 안내하는 것에 집중했다. 나는 참 차갑고, 정 없는 간호사였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할머니께서 무릎 수술 후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서 한 달가량 치료를 받으셨다. 항생제 치료에도 호전되지 않아 상태가 더 나빠지면 CRRT(지속적 신 대체요법)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령에 기관삽관과 인공호흡기로 인한 폐렴까지 겹쳤고, 만약 그 환자가 내 담당이라면 ‘참 골치 아픈 환자’라고 생각했을 그 환자가 우리 할머니였다.
지금까지 중환자실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면회 시간에 본 할머니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할머니의 모습은 없었고 그저 기계에 의존하여 연명하고 있는 걸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늘 의료진의 시선으로 환자를 대하던 내가, 처음으로 보호자의 시선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간 내가 만났던 보호자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짧은 면회였지만, 그들이 견뎌야 했던 시간과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깊었을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부모였고, 자녀였고, 형제였던 그들의 존재를 내가 되어보니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보호자의 입장에서 짧은 면회를 통해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말을 건네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 보호자들의 마음은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깊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 극단적 선택으로 내원한 20대 환자가 임종을 맞았을 때, 말없이 환자의 손을 잡고 주저앉아 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흘리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 역시 목이 메고 눈물이 핑 돌았다. 또 다른 날에는, 최선을 다해 치료를 했지만 결국 임종을 앞둔 80대 환자의 자녀들이 “사랑한다”, “고생 많았다”라며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이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뇌출혈로 입원한 50대 환자 역시 예후가 좋지 않아 보호자에게 “당분간은 집에서 대기하셔도 좋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보호자는 “괜찮다”라며 “환자 곁에 있고 싶다”라고 답했다. 그 말이,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무겁고 깊게 다가왔다.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경험은 나에게 간호사의 역할이 단지 치료를 넘어서, 마음을 이해하는 일임을 일깨워 주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보호자의 마음은 결코 곁에 있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는 것을. 그 깊이를 잴 수 없다 해도, 느끼려는 마음이 시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