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는 사람을 위한 공간을 설계합니다.
예술가는 사람의 감성을 풍요롭게 하고요,
요리사는 미각으로 사람을 즐겁게 합니다.
인간의‘삶’을 위해 누군가가 일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의 직업은, 이 모든 것들의 근본이 되는‘사람’그 자체를 돌보는 일입니다.
나는 간호사입니다.
나는 암센터에 근무 합니다.
처음 이곳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나는 암 환자들이 너무도 많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사후처치를 하다 보니 환자들이 다 나아서 퇴원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 병동을 사랑하고,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의‘관계’속에 가슴 울리는 감동이 있기 때문이며, 환자들이 각자의 시간을 꾸려 나가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우리 병동은 특성상 장기 환자가 많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새해를 맞고 나이를 한 살씩 나누어 먹으면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살다보니 특히 생각나는 환자분들이 계십니다.
어느 날 밤, 나는 나이트 근무를 할 때 이었습니다. 6인실 불은 모두 꺼져있고, 다른 환자들은 모두 훨훨 나는 단꿈을 꾸고 있을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병실 라운딩을 하던 중, 주무시는 줄 알았던 그분이 문득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곧 죽어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어떤 느낌이, 어떤 생각이 들지 상상하지 못하는 나는 그 말에 왠지 마음이 울컥하였습니다.
“저 시집갈 때 꼭 오셔요. 제일먼저 청첩장 드릴게요.”
나 스스로도, 그리고 당신도 나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분은 “정말 나 초대해 줄 거야?”라고 연거푸 물으시며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뒤, 나는 그분의 사후처치를 하였습니다. 그날 새로 산 마스카라를 처음 칠하고 출근했던 저는 혼자 숨어 검은 눈물을 몇 바가지나 쏟았는지 모릅니다.
내 가슴에 오래 남으실 분입니다. 자신은 무시무시한 암성통증에 몸을 떨면서도 선배에게 혼쭐이 나고 코끝이 빨개진 나를 자신의 침상 뒤로 숨겨놓고 세상의 모든 좋은 덕담들을 다 쏟아부어주신 분이니까요.
병원이란 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레테의 강과 같은 곳이기에 그 어느 곳보다 삶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고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환자들이 단 한순간도 삶에 대한 희망을 져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당신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을지라도, 매 순간을 불꽃처럼 강렬하게 살기를 당부합니다. 어쩌면 인생이란 끝을 향해 빠르게 타들어가는 성냥개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는 간호사도, 의사도 무력해지기 마련입니다. 나는 간호사로서 제공할 수 있는 진짜 supportive care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무리 짓는가도 중요하니까요.
“0시 0분 000님 사망하셨습니다.” 라는 담당의사의 사망선고 한마디로 한 사람의 인생이 정리되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내가 사랑했던 어느 환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곁을 지키던 가족들은 서서히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그분의 귀에 끊임없이 속삭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라고.
나는 그동안 수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왔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내 귀에 저렇게 속삭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환자들은 나에게 삶에 대한 태도를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자칫 말랑한 심장을 잃어버리고 감정은 메말라 버리기 쉬운 이 병원이라는 곳에서, 내가 시간을 누리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 매우 소중한 일임을 매 순간 깨닫게 합니다. 나는 그분들의 인생 어느 한 부분, 한 시점에 잠깐 나의 손길을 드릴 뿐 이지만 당신들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다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근무하는 시간동안 나는‘열 명의 환자를 돌보는 담당간호사’가 아닌,‘열 명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있는 학생’인 셈입니다.
누군가의 시간에 개입을 하고, 그 인생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그분들은 젊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을 남겼고, 나는 그분들의 삶의 끝자락을 돌보았던 간호사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