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이름은 몰라도 얼굴만 보면 웃으며 인사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올해 초 내가 진료지원간호사로 근무하는 병동에 정년퇴직하신 선생님이 폐암4기로 입원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병원에서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했고, 방사선종양학과에서 긴 시간을 보낸 사람. 함께 근무한 기억은 없지만, 병원을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복도에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바쁜 병원을 떠나 조금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살아가야할텐데,
폐암 4기 이미 뇌 전이까지 진행된 상태의 환자로 만나게 된 것이 쉽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누구나 언젠가는 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환자를 돌보던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슬펐다. 병실에서 선배를 처음 마주한 날도 잊을 수 없다.
환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익숙했지만, 선배에게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간호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한 후배였다.
몇달 뒤 다시 만난 선배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혈압이 떨어지고 흉통을 호소했다.
병실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담당간호사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도 선배의 병실로 달려갔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몇 달 전 경험했던 또 다른 폐암 환자가 떠올랐다.
폐암으로 치료받다가 갑작스럽게 악화되었던 심낭압전 사례였다.
그 환자를 경험한 뒤 나는 환자의 경과를 다시 정리했고, 왜 악화되었는지 공부했다.
그 과정은 대한심부전학회 Best Clinical Case 발표와 수상으로 이어졌지만, 그때는 그것이 가장 큰 의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배를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발표가 아니라, 환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담당의사는 이전 초음파를 확인하였고, 심낭압전이 의심된다고 하여 같이 초음파를 보고
순환기내과 연락하였다.
나는 곧바로 심전도를 시행하고, 응급 심낭천자술을 위한 동의서를 받았다.
동시에 정맥로를 확보하고 충분한 수액을 주입할 준비했다. 병실 안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잠시 후 순환기내과 의료진도 같은 방향으로 판단했고, 빠르게 수액이 투여되었다.
이후 선배는 응급 심낭천자술을 받기 위해 중환자실로 이동했다. 그날은 중환자실 병상조차 없었다. 결핵 병상을 급히 비우고 소독을 마친 뒤 겨우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선배의 침대를 밀며 복도를 걸었다. 그 짧은 복도가 그날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따님이 휴대전화로 그 모습을 조용히 촬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촬영을 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막을 수 없었다.
가족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을 것이다.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붙잡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말없이 침대를 밀었고, 중환자실 병상까지 옮겨드렸다.
다행히 시술은 잘 끝났고, 선배는 다시 병동으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며 안도감과 함께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전신 통증이 조절이 되지 않아 Morphine 지속 주입을 시작했다.
많은 말을 나누지는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오래 남았다.
'평생 누군가의 곁을 지켜 준 사람의 마지막 곁에는 누가 함께 있을까.'
그날 나는 그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선배는 이후에 급성기 호스피스병동으로 옮겼다.
우리는 늘 환자의 삶을 돌보며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우리 자신도, 우리와 함께 일했던 동료도 환자가 된다.
유니폼을 입었다고 해서 질병이 비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너무 먹먹했다.
그날 이후 나는 환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환자의 이름 뒤에는 누군가의 부모가 있고,
누군가의 배우자가 있으며,
어쩌면 평생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도 있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선배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간호를 가르쳐 주었다.
환자가 된 이후에도 말보다 삶으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평생 누군가를 돌보던 사람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 글이 선배에게 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평생 간호사였던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마지막까지 또 다른 간호사를 성장하게 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