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5시에 기상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인수인계를 마치고 아침 회진을 준비한다.
소화기내과 의사는 아침 회진을 하며, 어제 위내시경을 시행한 환자 결과를 확인하고 “10시 진료실로 오세요”라고 회진을 마치고 병실에서 나왔다.
이후 주치의가 간호사실로 “백oo님 내시경 결과 함께 들으실 가족 있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가족이 없어 혼자 설명을 들으셔야 됩니다.”라고 대답하며 충격받을 환자를 생각하니 맘이 좋지 않았다.
정신없는 오전 회진시간이 지나고 11시경이 되어서야 병실 라운딩을 시작했다. 백OO님은 의사 면담을 통해 위내시경 결과 위암이라는 설명을 듣고 병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는 모습이었다. 나 역시 환자 눈치만 볼 뿐 아무런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째 밥도 먹지 않고, 주사만 맞으며, 아무 말 없이 누워만 있는 환자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많이 힘드시죠?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없습니다’라며 단호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환자를 관찰하다 보니, 매일 오전이면 검은색 봉지에 무언가를 가지고 병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늘도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을까요?’라는 질문에 여전히 답을 듣지 못하고 돌아서는 순간 상두대 뒤편에 초록색 빈병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병원 규정상 음주 사실이 확인되면 강제 퇴원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여느 환자와는 다르게 큰소리로 ‘OOO님! 술드셨어요?’라고 큰소리로 외칠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나는 환자가 자신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강제 퇴원을 시키는 대신 환자 곁에서 발견되는 빈 초록병을 아무도 모르게 치우는 일을 열흘간 반복했다. 그러자 환자분이 내게 첫마디를 건네기 시작했다. ‘간호사님, 저 살 수 있을까요? 언제쯤 죽나요?’
많이 두렵고 힘들었던 감정을 표현하며, 사실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누구와 의논을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표현해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환자분의 치료 연계를 위해 상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던 나는 환자 연고지와 가까운 상급종합병원으로 진료 의뢰를 연결하고, 위암으로 회복한 사례들을 알려주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이후 수술 일정이 잡혀 퇴원하는 날까지 식사는 거부하고 있었으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깡말라버린 몸으로 눈도 맞추지 않고 퇴원하는 환자에게 달려가 나는 손을 꼭 잡고, 수술 잘 받고 퇴원해서 다시 요양하러 오라며,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환자를 배웅했다. 퇴원 자리를 정리하며 상두대 서랍에 ‘간호사님! 감사합니다’라는 쪽지를 보며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그렇게 며칠 동안은 그 병실을 들어 갈 때면 환자분이 계속 생각이 나고 궁금하기도 했다.
2년이 지난겨울 어느 날, 크리스마스 무렵에 나는 환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양복을 입은 훤칠한 남자가 양손 가득히 간식을 들고 산타할아버지처럼 간호사실 앞에 서서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간호사님! 수술 잘 받고 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라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양손에든 큰 꾸러미를 내려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너무 순식간의 일이라 나는 열심히 계단으로 뛰어 갔지만 환자분을 만날 수 없었고,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다른 간호사를 통해 환자분이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고 회복하였고, 실패한 사업에 다시 도전하여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 가족들과 함께 잘지내고 있다고 했다.
퇴원한 환자가 병동으로 다시 감사 인사를 위해 다시 찾아주는 일!
간호사로 일하면서 가장 감동을 받는 순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월이 흘러 나는 간호과장이 되었고, 외래를 방문한 백oo님과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는 간단한 인사를 하며, 돌아서는 순간 “내 술병 치워주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지금 이렇게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이제는 술 안 마십니다. 술병 치워주는 사람이 없어서요!“라며 쑥스럽게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가는 뒷모습을 본게 마지막이었다.
환자와 나의 초록병에 담긴 비밀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초록병을 마시고, 치우고를 반복하며 서로의 건강을 위한 의사소통을 했던게 아닐까?
임상에서 환자를 만날 때면 혼돈의 순간을 자주 맞이하게 된다. 그 혼돈의 순간에 나는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지만, 환자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고, 함께 회복해 나가는 간호가 진정한 간호가 아닌가 싶다.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환자와 함께 소통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