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6년째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처음 흰 가운을 입던 날의 긴장과 설렘은 이제 희미해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단단한 감정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나는 현재 위장관외과 병동과 외래를 오가며 위암과 식도암 환자들을 돌보는 전담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수술과 항암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하는 환자들과의 시간은 단순한 ‘진료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스며드는 긴 동행에 가깝다.
외래에서 다시 만나는 환자들은 내게 특별하다. 수술 전 불안으로 떨던 얼굴, 항암치료로 지쳐 있던 모습, 그리고 조금씩 회복해 가던 과정들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개월, 몇 년을 지나 다시 외래에서 만났을 때, 환자들의 밝아진 표정과 “선생님, 저 기억하세요?”라는 한마디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울림을 준다. 그 순간, 나는 이 일을 선택한 이유를 다시 깨닫게 된다.
우리 환자들은 길게는 10년까지도 추적검사를 하며 외래에서 계속 만나게 된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를 넘어선다. 누군가는 손주 이야기를 들려주고, 누군가는 여행 사진을 보여주며 건강해진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 끝에는 늘 비슷한 말이 따라온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그때 많이 힘이 됐어요.”
사실 나는 특별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환자 곁에서 조금 더 귀 기울이고, 한마디 더 건넸을 뿐이다. 그런데 환자들에게는 그 작은 행동 하나가 큰 힘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환자들은 종종 아이스커피 한 잔, 작은 간식 하나를 들고 찾아온다.
“바쁘실 텐데 드시면서 하세요.”
“항상 고생 많으세요.”
그 따뜻한 마음이 담긴 손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서게 된다.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작은 커피 한 잔에는 단순한 음료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긴 치료 과정을 잘 버텨낸 환자의 시간,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함께해 준 의료진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날은 외래가 너무 바빠 숨 돌릴 틈조차 없고, 어떤 날은 환자의 힘든 소식을 마주하며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한다. 간호사로서의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그 모든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건, 바로 이런 기억들이다. 환자가 건네는 짧은 한마디, 눈빛, 그리고 따뜻한 마음. 그것들이 쌓여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한다.
돌이켜보면 ‘간호사라서 행복했다’고 느낀 순간들은 거창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들 속에 있었다. 외래 진료실 앞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던 환자, 치료를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던 순간, 그리고 아이스커피 한 잔을 건네며 수고했다 말해주던 그 마음들. 그 모든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환자를 만났고, 또 수많은 이별을 겪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보람’과 ‘감사’다. 누군가의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하며, 그 사람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 그것이 내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다.
앞으로도 나는 같은 자리에서 환자들을 만날 것이다. 또 누군가의 긴 치료 여정을 함께 걷고, 다시 건강해진 모습으로 외래에서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아, 나는 간호사라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