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선생님, 아니세요? 저 하00 환자 남편입니다. 기억하시겠어요?"
2026년 1월의 어느 평범한 오후, 분주한 외래 진료실 복도에서 들려온 그 한마디에 나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28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중년 남성의 얼굴 너머로,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가족의 실루엣이 겹쳐졌다.
1998년, 서툴렀던 나의 첫 시작 그해, 나는 혈액종양내과 병동에 첫발을 내디딘 신규 간호사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어느 곳보다 치열했던 그곳에서 나는 유방암 투병 중이던 하00 님을 만났다. 신규 간호사의 떨리는 손길과 서툰 업무에도 그녀는 언제나 "선생님, 괜찮아요. 천천히 해요"라며 다정한 미소를 건네주던 분이었다. 그녀의 곁을 묵묵히 지키던 남편, 그리고 엄마의 아픔을 채 다 이해하지 못했을 어린 아들. 그 세 사람은 나에게 단순한 환자와 보호자를 넘어, 간호사로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처음으로 가르쳐준 가족이었다.
끝인 줄 알았던 인연의 페이지 그녀가 고단했던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떠나던 날, 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배웅하며 남모르게 눈물을 삼켰다. 환자가 세상을 떠나면 그 가족과의 인연도 마침표를 찍는 것이 병원의 섭리라 생각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는 남편분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그들은 나의 기억 한구석에 소중히 접어둔 한 페이지가 되었다.
외래에서 마주한 기적 같은 재회, 하지만 인연이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따뜻했다. 병동을 떠나 외래 간호사로 근무하며 수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 보내던 오늘, 나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 인연의 뒷이야기를 만난 것이다.
"어찌 잊겠습니까. 제가 그 시절을 어떻게 잊겠어요."
나를 알아봐 준 그분은 여전히 따뜻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병동에만 머물렀다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그들을, 외래라는 새로운 길목에서 다시 만난 것은 나에게 큰 축복이었다. 그는 아내가 떠난 뒤에도 나라는 간호사가 보여주었던 작은 손길과 사랑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해왔노라고 말했다.
다시 시작되는 그와의 짧은 대화는 나의 과거를, 그리고 이미 하늘의 별이 된 그녀를 다시금 가슴에 새기게 했다. 2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음에도, 우리가 나누었던 진심은 소멸하지 않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인연'과 '만남'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다시 느낀다. 오늘 내가 무심코 건넨 안부 한마디, 정성껏 드레싱을 해주던 그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위로가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나를 기억해 준 그 가족 덕분에 나는 오늘 다시 힘을 얻는다. 1998년의 그 초심을 잊지 말라고, 환자가 떠난 후에도 남겨진 이들의 마음속에 당신은 여전히 '좋은 간호사'로 살고 있다는 그 따뜻한 격려가 나의 지친 어깨를 다독여준다. 나는 오늘도 외래의 환자들 속에서 또 다른 소중한 인연을 심는다. 언젠가 다시 만나 "고마웠다"는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더 정성 어린 마음으로 그들 곁을 지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