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가장 절박한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간호사는 단지 생명을 돌보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생명을 놓는 순간에도 가장 가까이 머무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29년 차 간호사입니다.
간호사의 첫걸음을 뗀 곳도 내과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처음 임종을 경험했을 때, 보호자들의 울부짖음에 저도 함께 울며 무너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중학교 시절,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이후 처음 마주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바쁜 일상에 쫓기고, 감정의 여유가 사라지면서, 언젠가부터 저는 슬픔조차 제쳐둔 채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임종 환자를 보내고, 곧바로 응급실 환자를 받아야 하는 그 절박한 현실 속에서 눈물을 삼키는 일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잊을 수 없는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심혈관계 중환자실 출입문이 열리던 순간, 병동을 울리는 절절한 울음소리가 저를 멈춰 세웠습니다.
"나는 아무 준비도 안 됐는데… 이건 반칙이잖아… 여보… 제발 눈 좀 떠봐…"
가방도 내려놓지 못한 채, 저는 그 자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습니다.
커튼 너머, 앳된 얼굴의 딸과 무릎을 꿇은 부인이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환자는 이미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고, 모니터에서는 ‘딩동, 딩동’ 경고음이 끊임없이 울렸습니다.
심장은 이제 멈추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부인은 침대 side rail을 붙들고 일어났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며, 절박하고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남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조용히 다가가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옆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었습니다. 때론 위로의 말보다, 침묵 속에 함께 머무는 존재가 더 깊은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제 남편이 스스로 운전해서 응급실에 왔어요.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더니,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이제 눈도 못 뜨고, 말도 못 해요…
아무 말도 못 했는데 이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울먹이며 제게 기대왔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자, 남편을 놓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의 절규였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간간이 공감의 손을 내밀며 함께 울었습니다.
그날, 간호사의 임무는 더 이상 의학적 처치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곁에 있음’이 전부였습니다. 잠시 후, 그녀는 딸을 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딸… 아기예요. 아직 혼자 아무것도 못 하는데… 어떻게 이 아이들과 제가 남겨질 수 있나요…”
저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끝까지 그 말을 다 들었습니다.
그날의 위로는 거창한 말이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함께 울고, 함께 들어주고, 잠시라도 세상이 무너진 자리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었습니다. 남편분은 몇 시간 후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부인은 떠나며 마지막으로 제게 인사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다시 인사 못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선생님이 있어주셔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어요.”
그날, 저는 한참을 멍하니 그 가족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다가 병동 안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심혈관계 중환자실은 유독 이별이 빠르게, 조용히 찾아옵니다.
심장이 멈추는 그 짧은 순간은, 가족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습니다.
29년의 간호사 생활 속에서 저는 배웠습니다. 간호는 생명을 살리는 일인 동시에, 한 생을 함께 보내는 깊은 동행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말 한마디보다, 조용히 머무는 그 자리가 가장 따뜻한 간호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저는 그 자리에, 누군가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머무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