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난 중환자실에서 근무 중이었고 지금의 사랑스런 우리 아기가 찾아왔다. 당시 나에겐 임신이라는 것과 코로나로 인해 사회가 달라진 것 이외에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가 나의 일상을 가장 크게 변화시켰다.
같은 해 12월, 코로나 환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코로나 중증환자들이 입원할 수 있는 중증병상이 부족해졌고, 이에 병상확보를 위한 행정명령이 떨어지면서 국가지정병상과 가장 가까운 우리 중환자실은 코로나 병상으로 바뀌기로 결정이 된 것이다. 당시 난 임신 7개월이었기 때문에 타중환자실로 헬퍼 가기로 결정이 되었다. 모든 것이 지금의 중환자실에 적응되어있는 나에게 앞으로 출산까지 남은 몇 달 동안 타부서로의 헬퍼는 부담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PAPR 착의조차 불가능한 나의 입장에선 피할 수 없는 결정이었기 때문에 코로나 병상으로 바뀜과 동시에 타중환자실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난 평소에도 일할 때 성격상 가만히 있질 못하지만, 배가 많이 부른 상태에서 헬퍼를 가서 더 민폐가 되는 건 아닐까 싶어 뭔가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지며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일하는 나의 모습이 많이 힘들어 보였던 걸까, 타중환자실 부서원 모두 나에 대한 배려를 굉장히 많이 해줬고 그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중환자실의 특성상 활동량이 워낙 많은 곳이라 이것저것 생각하며 일할 겨를이 없기 때문에 난 더 움직이게 되었고,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부서가 아니다 보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고 ’도움이 안 되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매 근무 때마다 들었다. 그랬더니 나도 모르게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합쳐지면서 몸에 무리가 왔고, 임신 36주에 조기 수축이 오면서 입원까지 하게되었다. 다행히 안정을 찾아 조기출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정말 말로 표현이 다 안 되는 두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일을 겪고 다시 근무를 하면서 움직일 때 많이 조심스러워졌고 배는 더 불러와 펭귄처럼 뒤뚱뒤뚱 걷기도 했다. 그런 날 부서원들은 안타깝게 바라보며 걱정하고 더 신경써주기 시작했다. 항상 날 보며 “괜찮으세요? 많이 힘드실 것 같아요.”, “선생님 저희가 할게요. 좀 앉아서 쉬세요.” 등의 말로 나를 걱정해주고 배려해주었다.
‘난 그냥 잠시 머물렀다가 원래 부서로 돌아갈 멤버인데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선생님들에게 잊지 못할 따뜻함과 배려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뱃속에 아기가 생각보다 컸던지라 주수를 다 채우지 못한 상태로 출산이 결정 되면서 급하게 입원하여 출산 준비를 하게 되어 선생님들에게 직접 인사도 못하고 분만 휴가를 들어가게 되었다. 모두에게 얼굴 보며 인사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출산 전 시간이 되어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할 수 있게 되어 편지를 쓰게 되었다.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편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적어보자면,
‘선생님들께.
배부른 상태에서 헬퍼를 오게 되어 도움은커녕 오히려 민폐가 된 건 아닐지 걱정이네요.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하긴 했는데, 그 마음이 전달되었을지 모르겠어요. 두 달 반 남짓 근무하면서 저를 향한 걱정과 도움, 그리고 넘치는 배려에 정말 감사드려요. 잊지 않을게요. 선생님들 모두가 아픈 곳 없이 건강 챙기면서 근무하시길 바랄게요.’
이렇게 나의 마음을 담아 짧지만 진심의 글을 남겼던 거 같다.
이 계기로 다른 부서에서 헬퍼를 왔던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배려하지 못했던 나를 되돌아보며 ‘내가 받은 그 친절과 배려를 마음에 담아 앞으로는 내가 더 베풀어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낯설어 싫었을 법도 했던 새로운 경험이 오히려 나를 되돌아보고 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타부서원들의 좋은 영향력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앞서 걱정하고 불평만 하기 보다는 그것이 좋은 기회와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조언도 해주고 응원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