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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플러스 스토리

참신한 시각으로 간호사와 함께 호흡합니다.

간호사 24시, 그 story 가 궁금합니다.

간호 업무를 하면서 눈물 나게 감동했던 일들, 동료 간호사의 보석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선행,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던 기가막힌 아이디어 활동, 간호사라 행복했던 그 때 그 순간,
우리끼리 通하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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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2017531일 수요일 내가 속해있는 정형외과 관절경 수술방에서는 그날의 2번째 전방십자인대재건 수술과정이 막 끝났고 상처 봉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난 스크럽 중이었고 수술참여 전 컴퓨터 앞에 올려두고 들어온 내 휴대전화는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순회 간호사가 전화를 받더니 급한 표정으로 내 귀에 휴대폰을 대주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조급한 목소리의 아내였다.

남편 곧 탯줄 자르러 와야할 것 같아!”

곧 분만실에서 우리 부부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2세가 태어난다는 소식이었다. 

2016년 봄으로 기억된다. 2011년 결혼에 골인한 우리 부부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음에도 자녀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고 의학의 힘을 빌려서라도 아이를 갖기로 결정 하게 되었다. 그 후 1년동안 인공수정 2회 시험관 1회를 시도하면서 우리 부부는 많이 초초해 졌고 먼저 시행한 인공수정 2회의 실패를 겪으면서 많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결심으로 시작된 시험관 시술에서는 투석실 간호사로 교대근무를 하던 아내의 상황에 매일 맞는 호르몬 주사와 더불어 2,3일에 한번씩 산부인과에 내원해야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10년간 한번도 쉬지 않았던 간호사의 끈도 잠시 내려 놓았다. 남편이 간호사라고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호르몬 주사를 놓아주는 일 뿐 거의가 아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정말 감사하게도 30프로의 확률밖에는 안된다는 첫번째 시험관 시술이 우리에게 임신이라는 선물이 되어 주었고 아직도 초음파에 콩알만한 아기집을 보고 기뻐하던 우리 부부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 기쁨도 잠시 임신 안정기에 접어 들기까지는 살얼음판의 연속이었다. 또 한번의 고비가 그렇게 지나, 꽃길일 줄만 알았던 우리 부부에게 선천성 기형아 검사의 날이 다가왔고 힘들게 찾아온 뱃속의 태아는 이 또한 수월히 넘어가 주지를 않았다.

다운증후군 고위험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를 듣고 외래에서 돌아온 아내와 나는 서로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결국 양수 검사까지 위험을 무릎쓰고 시행하게 되었고 정말 감사하게도 정상이라는 결과를 듣게되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아이가 이제 세상에 나올 기미가 보였고 분만실로 입원해 하루가 넘게 진통을 하고있던 아내에게서 온 전화였다.

다행히 몇일 전부터 수선생님께는 사정을 말해둔 터라 교대를 와준 선생님과 손을 치고 부랴 부랴 분만실로 달려갔다. 평소에는 그렇게 가깝게만 느껴졌던 수술실입구에서 분만실 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 아내가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고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도착한 분만실에서 20,30분 정도 아내의 마지막 진통을 지켜보았고 그동안의 고생을 보답하기라도 하듯 큰 진통 없이 아이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와 주었다. 하루에도 몇 번을, 전공의 선생님이 피부 봉합하는 실을 잘라주던 가위를 손에 들고 탯줄을 자르려는데 손은 또 왜 그리도 떨리던지, 그렇게 아이는 신생아실로 소아과 선생님의 품에 안겨 떠났고 아내와 한동안 기쁨의 포옹을 나눴다.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주친 서로의 눈에 1년간의 고통과 기다림이 스쳐 지나갔다. 아내는 편안히 병동으로 이송되었고 신생아실에서 보호자 호출이 왔다. 출산할 때는 아내가 걱정되어 자세히 보지 못한 아이가 이제야 궁굼해지기 시작했고 한걸음에 신생아 실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소아과 전공의 선생님이 설명을 위해 기다리고 계셨는데 표정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전공의 선생님의 설명인 즉은... 아기에게서 심 잡음이 들려 시행한 심초음파상 동맥관 개존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져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하기에 신생아 준중환자실로 옮겼다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동맥관이 닫기지 않는다면 심장 시술이나 수술까지도 고려해야 된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계셨지만 정작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이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렇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보러 들어간 신생아 준중환자실에는 수액라인을 잡고 피딩 튜브를 꽂고 있는 작고 작은 내 아들이 있었다. 본인의 상황을 알기나 하는지 내가 내민 손가락을 꼭 잡아주는 아이 앞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렇게 잠깐의 면회가 끝나고 병실에 올라와 아무것도 모르고 온통 아기에 대한 궁굼증에 신생아실로 가보자는 아내를 붙잡고 사정을 설명하며 우리부부는 또한번 눈시울을 적셨다. 그렇게 행복할 줄로만 알았던 출산 후 입원 기간은 하루 두번 정해진 면회 시간만 잠깐 볼 수 있는 아이와 그 아이를 보고싶어하는 양가 부모님들께 걱정끼쳐 드리지 않기위해 대학병원은 신생아실 면회가 원래 어려운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다음날 면회 시간은 다시 찾아왔고 아내와 함께간 아이의 인큐베이터 이름표에 적혀있는 OOO아가 라는 글씨가 우리 부부의 마음에 왜 그리도 걸리던지, 이 아이에게 OOO아가가 아닌 이름을 지어주어 엄마,아빠가 얼마나 건강해진 너의 모습을 보고싶어 하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사실 만삭일 때부터 평소 라일락 향을 유난히 좋아하던 아내는 아이 이름을 우리 뜻대로 할 수만 있다면 홍라일로 하고 싶다고 말하고는 했었지만 사주와 작명을 중시하는 장인, 장모님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디서 난 용기인지 오전 면회가 끝나자마자 난 병원을 나서 출생신고를 위해 동사무소로 향했고 도착해서야 한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열매() 기쁠(), 이런 저런 상황에도 이 아이는 아니 라일이는 우리 부부에게 기쁨의 열매임이 분명했다. 그렇게 출생 신고를 마치고 다시 만나러 간 라일이의 저녁 면회시간은 우리 부부에게 또다른 의미였고 아이는 엄마,아빠가 처음 불러주는 라일이라는 이름이 맘에 든다는 듯이 웃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 부부의 간절한 마음이 라일이에게도 전달이 되었던 것일까 아이에게서 들리던 심 잡음은 하루하루 갈수록 점점 작아져 가고 있었고 정상적으로 출산한 아이들보다 딱 하루만 더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하면 되어 다행히 엄마와 함께 조리원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완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뿐더라 2달후의 심초음파 검사에서 정상소견이 나와야 안심할 수가 있었기에 조리원에서의 2주도 집으로 와서의 한달반의 육아 기간도 우리 부부에게는 마냥 행복일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한가지 위안이었던 것은 지치고 힘들 수도 있는 60일간의 육아 생활이 그저 하루하루 탈 없이 커주고 있는 라일이에게 감사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란 것이었다. 하지만 잠깐 울기라도 할 때면 우리 부부는 동맥관 개존증 때문에 아이가 혹시 아픈 것은 아닌지 눈시울을 붉히는 일이 많았다. 가족이나 병원 동료들에게 표현도 할 수 없던 나와, 아이와 함께 집에있던 부인에게도 60일 이라는 시간은 너무 더디게 지나갔다. 그렇게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64일째 심초음파 검사의 날은 돌아왔고 우리 부부의 기도와 바램을 안고 받은 검사결과는...감사하게도 정상이었다. 결과를 듣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또한 우리 부부에게 감사의 눈물길이었고 임신을 위한 1년과 출산후 60, 이 기간동안 우리 부부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얻게 되었다. 간호사로 10년을 일한 우리에게 모르고 지나왔던 보호자와 환자의 불안과 걱정, 감사를 느끼게 해준 첫번째 기회였으며 직장 동료로써 임신을 준비하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감당하는 동료 간호사들과 항상 함께 일하면서도 엄마의,부모의 무게와 고충을 알지 못했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에게 큰 반성의 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가정에 기쁨의 열매가 되어준 우리아들 라일아 그 누구보다 고생했을 너에게 잘 이겨내 준 것 너무 너무 감사한다. 엄마,아빠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이 160일만에 큰 선물이 되어준 너와 이 시간을 잊지 않고, 너무 욕심 부리지 않는 좋은 부모, 직장에서는 동료와 환자를 마음으로 품어 줄 수 있는 간호사가 되도록 노력할게.

이제야 아빠를 철들게 해준 홍라일 너무 너무 사랑한다.

김영란2018-10-04
힘든시간이 느껴지는 글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답니다. 저도 이십 여년전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적이 있거든요. 저희 아이도 이제는 잘자라서 사회인으로 한 몫을 잘하고 있으니 라일이에게도 이름에서 처럼 기쁜일들이 올 거라 믿으며 축하와 축복이 담긴 맘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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