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대화”
응급실 간호사 윤혜원
핸드폰 알람소리에 눈을 뜨는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 5시, 오후 12시, 저녁 7시가 하루의 시작인 나는 삼교대 간호사다. -쉴 새 없이 뛰어다니고 사람에 치이고 기계에 치이고. 침대에 부딪히는 내 정강이의 멍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 우주속의 행성들. “띵-띵-띵 땡-땡-땡” 귀를 울리는 알람 소리를 BGM 삼아 움직이는 응급실 간호사다.
내 나이 열여덟. 우리 아빠는 예순일곱 비호지킨 림프종 환자였다. 2010년 산책 중 갑작스러운 숨찬 증상으로 병원을 찾은 아빠에게 병원은 고작 6개월이라는 시한부 삶을 선고했다. 어렸던 나에게 살아오면서 가장 큰 비보였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는 이유로 골수이식의 선택권도 없었다. “지들이 신도 아니면서 어떻게 사람 남은 인생을 선고해” 라고 생각했더랬다. 의학 지식에 무지한 내가 싫었고 사람의 인생을 숫자로 표현하는 그들이 싫어 나는 의료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 ‘의료인이 되어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남일 대하듯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대학병원을 우리 집 안방처럼 드나든지 어언 1년. 모두의 바람처럼 아빠는 점점 쾌차하셨다.
내 나이 열아홉. 완치 1년 만에 재발이라는 몹쓸 친구가 찾아왔다. 쾌차라는 친구가 매우 심기에 거슬렸던 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아빠를 다시 힘들게 했다. 이번엔 6개월이 아닌 한 달. 만 2년이라는 시간동안 우리 가족은 점점 지쳐갔고 아빠도 힘겨워했다. 이제는 ‘1년 전처럼 완치하겠지.’라는 믿음 한 구석에 자신감 잃어가는 내가 서있었다.
내 나이 스물. 한창 대학생활에 물들고 철없이 놀고 싶어 하던 때. 아빠는 점점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나와 엄마는 일주일에서 한 달 동안은 병원간이침대, 문 닫은 병원 로비의 두세 칸짜리 대기의자에 몸을 누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중 “사랑하는 우리 똥강아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아빠는 나에게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성되어 있던 심폐소생술 금지 요청서. 그렇게 나는 아빠의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부정을 하면서도 2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대학병원 응급실 간호사가 되었다. 하루에도 내 손을 거쳐 가는 환자와 보호자의 수는 상당하다. 생각보다 암 투병환자들이 꽤나 많다. 처음엔 그들을 대하기 어려웠다. 지난날의 우리 아빠 모습이 떠올랐고 아빠 옆에 있던 내가 떠올랐기에. 또한 응급실 한복판에서 가족을 떠나보내고 마음 추스를 시간도 없이 장례식장으로 이동해야 하는 유가족을 보내며 소리 없는 위로를 건네고는 한다. - 내 마음을 알아 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간이 흘러 그들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의 삶을 먼저 경험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울컥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편안한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었고 이해해 주고 싶었다. “환자분 힘드시죠. 보호자분은 응급실에 침대도 없어서 어떻게 해요. 저도 잘 알아요..” 이런 한마디 한마디에 가족들은 힘을 낸다. 힘들어도 웃는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하는 “소리 없는 대화”를 나는 오늘도 그들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