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4일. 천사 데이라는 이름아래 병원 식구들이 환자와 더 가까워지는 날이라고 하셨다. 오랜만에 찾아온 쉬는 날이라 늘어지게 아침 잠을 자고 싶었지만, 이 역시 간호사의 본분이라면 즐겁게 보내자는 마음으로 병원문을 열었다. 다들 그런 마음이었을까? 병원 식구들 얼굴이 다른 날 보다 밝아 보이는 듯 했다.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빵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환복을 하고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음료 서비스를 도왔다. 커피나 녹차 같은 차 종류는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반응이 좋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예상은 빗나갔다. 한 잔 더 달라고 찾아오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고, 우리들을 말동무 삼아 이런저런 옛날 얘기를 하시기도 했다. 의료원이라는 병원 특성상 노인분들이 많이 찾아오시는데, 그분들에게 있어 티타임은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을 떠나 손녀 같은 우리들의 정을 느꼈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억에 남는 사건은 입원 환자들과 보낸 시간에 일어났다. 평소에도 환자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잘 나누는 편이나 오늘은 특별히 시원한 손 마사지와 함께 봉숭아물 들이는 시간을 가졌기에 더 오랜 시간 함께했다. 손톱이 하나 둘 붉게 물들기 시작하자, 할머님들께서는 “아이고 곱다 고와. 손톱에 봉숭아물이 들여져 있으면 저승길이 그렇게 밝다고 하는데 너무 고마우이.” 라는 말씀을 하셨다. 처음 들어본 말 이였다. 병원에서 건강을 되찾고 다가올 행복을 기대하는 분들보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너무 많아 가슴 한구석이 무거웠다. 특히 우리 병동 할머니 중 한 분은 사고로 인해 손톱이 온전치 못하시다. 할머니는 내게 평생 동안 그 손이 부끄러워 봉숭아물 한 번 들여 보지 못했고 남들에게 손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자꾸만 감추시려 하는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작은 꽃을 얹어드렸는데, 평생의 한이었다며 내 손을 잡고 그렇게 우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먹먹하다.
대학생 시절, 간호사가 환자를 상대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건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지 기계처럼 읊조렸고 교과서적인 임상 간호사가 될 것이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에 대한 스트레스에 어는 순간부터 나는 겉모습만 간호사일 뿐, 속은 봉사점수를 위해 억지로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보다 더 못한 마음가짐으로 지내고 있었다.
하루간의 짧은 소통. 하지만 나는 천사 데이를 계기로 바뀌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작은 감동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조금씩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내민 작은 손보다 환자들에게서 받은 따뜻한 마음이 훨씬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알랭은 “딸기가 딸기 맛을 지니고 있듯이, 삶은 행복이란 맛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내 삶의 행복은 간호사로써 느끼는 감동과 나눔, 봉사정신이 곁들여 졌을 때 최고조에 달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비는 꽃 옆에서 가장 아름답듯이 환자들 옆에서 가장 아름다운 간호사가 될 내 모습을 위해 앞으로 더 정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