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남 ”의 문턱에서 함께 지켜낸 “ 머묾 ”
어느 평범한 날, 갑자기 울린 짧은 문자메시지 한 통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선생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나이트 근무 끝나고 내일 아침에 상담 가능하실지 여쭙습니다... "
병원 입사 후 여러 고비를 넘기고 있을 한 신규 간호사 선생님의 다급한 요청이었습니다. 같은 부서 소속도 아닌 제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면담을 요청할 정도라면, 지금 이 친구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하지만 예정된 코칭 교육과 강의 등 빡빡한 일정 탓에 즉각적인 면담은 쉽지 않았습니다. 신규 선생님 역시 지속되는 교대 업무로 인해 약속 시간을 미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직감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가장 절실한 “심리적 골든타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즉시 날짜를 지정하고 점심시간을 반납하며 신규 간호사 선생님의 시간에 맞춰 면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당연히 면담 상황과 내용은 철저히 비밀로 하는 것이 상호 간의 믿음이자 선배로서의 의리였습니다.
마주 앉은 신규 간호사 선생님은 오랜 시간 스스로를 소진하고 있었습니다. 학생 때와는 달리 고도의 전문성과 정밀함이 요구되는 병동 환경은 이제 막 적응을 시작한 신규 간호사에게 너무나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특히 불규칙한 교대 근무와 갑작스러운 팀 변경으로 인해 매번 새로운 업무와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은 신규 선생님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완벽해야 한다”라는 스스로의 높은 기준 또한 어느새 부담과 자책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고, 젊음이라는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이 길이 아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사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요"
떨리는 목소리에는 두려움 또한 가득했습니다. 저는 성급한 조언이나 정답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대신 선배라는 권위를 내려놓고, 10년 가까이 근무하는 저 역시 매일 새로운 업무 앞에 작아지곤 한다는 고백을 먼저 꺼냈습니다. 여러 병동을 돌며 교육하고 강의를 진행하는 지금의 저도 사실은 매번 적응이 어렵고, 한때는 다른 꿈에 도전해 보고 싶어 방황했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전했습니다. 이는 자기결정성 이론의 핵심인 “관계성”을 통해 "나도 선생님과 같은 고민을 늘 하는 사람이다"라는 공감의 다리를 놓는 과정이었습니다.
또한, 칭찬에 인색한 병원 문화 속에서 신규 간호사 선생님이 잊고 있었던 가치를 일깨워 주고자 했습니다. 병원에서 “잘했다”라는 칭찬을 듣기가 참 어렵지만 제가 프리셉터 시절부터 현장교육간호사까지 만나온 수많은 신규 간호사 선생님 중에서도, 선생님은 누구보다 훌륭한 임상 간호사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닌, 전문가로서 내린 확신이었습니다.
이 한마디는 신규 간호사 선생님이 잃어버렸던 자기효능감을 다시 세우는 강력한 임파워먼트의 순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10년 전 신규 간호사 시절, 프리셉터 선생님께 들었던 이 말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며 저를 버티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위해 달려와 준 선배의 진심을 느꼈는지,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약 1시간이 넘는 소통 이후 몇 주가 지났습니다. 다시 연락이 닿은 신규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자책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공부하며 환자의 상태를 능동적으로 파악하는 “ 진짜 간호사 ”의 모습이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었습니다. 그 몇 주의 시간은, 현장교육간호사나 선배가 아닌 그저 편한 “ 동네 아저씨 ”로 건넨 진심이 선생님의 가슴속에 뿌리내리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다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이제는 적응됐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
그 대답이 100% 진심일지, 혹은 상황에 의한 다짐일지는 알 수 없지만, 쑥쑥 성장해 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현장교육간호사로서 형언할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낍니다.
"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
영화의 제목처럼, 신규 간호사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던진 물음은 " 내가 이곳에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달라 "는 외침일지도 모릅니다. 현장교육간호사의 역할은 어려운 지식의 전달을 넘어, 후배가 자신의 가치를 믿고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도록 든든한 심리적 안전망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는 신규 간호사 선생님들의 곁에서 따뜻한 ” 머묾의 이정표 “로 서 있고자 합니다. 함께 가르치고 배우며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마음으로, 그들이 어엿한 사회인으로 커가는 과정을 돕는 것보다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환자의 치유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이지만, 동료와 선후배가 함께 성장하며 건강한 간호 문화를 만드는 것 또한 우리가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할 소중한 이유라고 굳게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