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대단하다, 힘들지 않냐”는 말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늘 웃으며 “괜찮아요, 익숙해요”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익숙해진다는 것과 힘들지 않다는 건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중환자실이라는 공간은 늘 긴장감이 맴돕니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환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누군가의 하루가,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저희 간호사들은
무너지는 마음을 꼭 붙잡은 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 중환자실에 한 여성 환자분이 뇌수술 후 입원하셨습니다.
수술을 받은 직후였고, 초기 상태는 불안정했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환자분의 mental이 confusion한 상태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점차 혼란이 심해지면서 헛소리를 하고,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팔다리를 휘두르며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마주해 왔지만,
그날은 유독 감정이 벅찼습니다.
환자분의 말과 행동은 반복적으로 제 감정을 소모시켰고,
마음 한켠에 점점 짜증과 지침이 쌓여만 갔습니다.
‘나는 도와주려는 건데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지…?’
‘이해는 되지만, 정말 지친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환자분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로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언니, 왜 아직 퇴근 안 해?”
“밥 같이 먹자~ 나 혼자 먹기 싫어.”
저를 언니라 부르는 이 환자에게
“언니 아니에요.”
“같이 못 먹어요.”
“아직 퇴근 시간 아니에요.”
쌀쌀맞게 툭툭 대답하면,
“언니, 내가 아는 사람이랑 비슷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라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들이 귀엽고도 애틋하지만,
그 당시의 저는 그런 말조차 귀찮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말 하나 건네지 못했습니다.
그저 매뉴얼대로, 무표정한 얼굴로, 간호 업무만을 수행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흘러 환자분의 상태는 점차 나아졌고,
무사히 병동으로 이실하였습니다.
저는 평소처럼 다시 또 다른 환자의 곁으로 향했고,
그 환자분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ICU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저를 불렀습니다.
안경을 끼고 휠체어를 탄, 환한 미소를 머금은 그 여성 환자분이
가족들과 함께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잠시 멈춰 섰습니다.
처음엔 환자분이 맞나 싶었을 정도로 너무도 건강하고 밝은 모습이었거든요.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간호사분이 중환자실에서 너무 잘해줬어요.
내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상하게 이 간호사분은 기억이 나.
너무 감사해서 꼭 인사드리고, 가족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후회, 아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습니다.
나는 좋은 간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혼란스러운 날들 속에서 나는 따뜻한 말을 해주지 못했고,
그녀의 두려움에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의무감에 버틴 하루들이었는데,
그녀는 그 시간을 ‘고마움’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날 처음으로 마음속에 되뇌었습니다.
“그땐 내가 너한테 미안했어요.
그리고…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간호사라는 직업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해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나의 진심을 기억해주는 환자를 만나면,
그 모든 힘겨움이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제가 다시 간호사로서 자부심을 갖고 하루를 살아가는 데
무척이나 큰 힘이 됩니다.
저는 오늘도 중환자실에서 일합니다.
어쩌면 또 한 명의 환자가 혼란 속에서 제게 버겁게 다가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이,
어디선가 누군가의 회복의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저는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